영화 <설국열차>처럼 멈추지 않고 달리는 열차가 가능할까?

영화 <설국열차>는 ‘영화와 과학’이라는 키워드로 읽을 때 더욱 풍성해지는 작품입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적 통찰과 장르적 재미가 맞물려, 기후 재난 이후 인류가 단 한 대의 열차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극한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아래에서는 ① 줄거리와 특징, 화제가 된 장면과 작품성, ② 열차가 끝없이 달리는 설정과 열차 안 생존 시스템, ③ 과학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원리 검토 순으로 차근차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줄거리·특징·눈에 띄는 장면과 화제
<설국열차>는 기후위기를 해결하려고 살포한 냉각 물질이 역효과를 일으켜 지구가 순식간에 빙하기로 얼어붙은 이후, 인류 생존자가 거대한 상시 순환 열차 안에서 계급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열차의 설계자 윌포드가 ‘영구 기관’이라 불리는 엔진으로 열차를 멈추지 않게 운행하고, 열차 내부는 칸마다 기능과 계급이 분절되어 있습니다. 꼬리칸의 극빈층은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고, 앞쪽 칸으로 갈수록 학교, 사우나, 수족관, 농원, 레스토랑 등 풍요로운 서비스가 펼쳐지며 배분의 불평등이 극명해집니다. 이 불균형 속에서 꼬리칸의 커티스가 반란을 일으켜 앞으로 전진하는 여정은 계급 상승의 물리적 궤적이자 사회적 메타포로 기능합니다.
눈에 띄는 장면은 다층적입니다. 학교 칸에서 벌어지는 선전 교육은 체제 유지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단백질 블록의 충격적 진실은 ‘생존의 윤리’에 질문을 던집니다. 또 칸을 이동할수록 ‘문명’의 사치가 살아남은 소수에게 집중됐음을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눈보라를 가르며 터널·교량을 통과하는 거대한 열차의 스케일, 협소한 통로에서 벌어지는 근접 전투,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얼어붙은 세상은 묵직한 체감도를 제공합니다. 작품성 면에서 <설국열차>는 장르적 재미와 사회 풍자를 결합한 봉준호 시네마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계급, 제의, 폭력, 프로파간다를 응축해 낸 연출,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 미술·의상·사운드의 정교한 조합은 한국영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점입니다.
끝없이 달리는 열차와 열차 안의 생존 시스템
설정상 열차는 멈출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깥은 생명 활동이 불가능한 극저온의 죽음의 대지이기 때문입니다. 열차가 서는 순간 난방·공조·순환 시스템이 중단되고, 승객은 즉각 혹한에 노출됩니다. 따라서 ‘지속적 운동’이 곧 ‘생존 유지’와 동의어가 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가 윌포드의 ‘영구 기관’입니다. 영화 속에서 엔진은 거의 신격화되어 '질서와 운행'의 상징, 더 나아가 체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됩니다.
열차 안 생활은 폐쇄형 자급 시스템을 전제로 합니다. 식량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후방에서는 단백질 블록이 보급됩니다. 이는 대량 사육·가공이 가능하고 저장성이 좋아 ‘최소한의 칼로리’를 보장합니다. 전방에는 수족관·온실·축사 칸이 있어 어류·야채·과일·단백질을 순환 공급합니다. 물은 설원에서 채빙·융해·정수 과정을 통해 재공급되며, 공기는 압축·여과·순환 장치를 통해 CO₂를 흡수하고 산소를 보충합니다. 복지·교육·오락 칸은 체제의 만족과 순응을 강화하는 장치로, 통제와 배분의 도구로도 작동합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① 안정적 에너지(엔진·난방·동력), ② 물·공기·식량의 닫힌 순환, ③ 갈등을 제어하는 ‘질서’입니다. 영화는 이 셋을 기술과 정치가 결탁해 유지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엔진이 멈추지 않게 하려면 궤도 유지·빙설 제거·차륜 윤활·차량 정비가 필수인데, 이는 노동력과 엄격한 역할 분담을 요구합니다. 윌포드는 이 필요를 ‘필연적 불평등’로 포장해 계급 고착을 정당화합니다. 정기적 ‘인구 조절’과 폭력적 진압은 냉혹하지만 체제 유지의 매뉴얼로 암시됩니다. 즉, 열차가 달리는 기술적 이유는 에너지와 보전이지만, 사회가 굴러가는 정치적 이유는 불평등의 관리와 폭력의 독점입니다.
끝없이 달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영화적으로 제시됩니다. 혹한 속 선로를 확보하려면 교량의 열팽창·수축 대응, 제설·제빙 설비, 차륜과 궤도의 마찰 관리가 필요합니다. 또 장기 운행을 위해 예비 부품의 내장 생산(소형 공작 설비), 의학 칸의 감염 통제, 보육·교육 칸의 인력 재생산이 필수입니다. 영화는 이를 칸 단위로 배치해 ‘움직이는 도시’의 면모를 구현합니다. 다만 이 시스템의 비용은 고통의 불균등 배분으로 치러집니다. 꼬리칸은 에너지·자원 손실을 보전하는 ‘완충재’로 취급되고, 그 위에서 상부 칸의 치장과 풍요가 성립합니다. 이 윤리적 불균형이 반란의 불씨가 되고, 엔진-질서-폭력의 삼각구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나아갑니다.
과학적 원리와 한계
그렇다면 열차가 이렇게 끝없이 달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물리학적으로 ‘영구 기관’은 불가능합니다. 열역학 제1·2법칙에 따르면, 외부로부터 에너지 유입 없이 일을 영원히 하는 장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열차가 수십 년 운행하려면 핵분열·핵융합·고효율 연료전지·SMR(소형모듈원전) 같은 고밀도 에너지원이 필요합니다. 또한 제설·난방·공조·추력·보조 전력까지 모두 감당하려면 에너지 수지는 더욱 빡빡해집니다. 폐쇄형 생태계도 도전적입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처럼 물·공기를 상당 부분 재생산하는 기술은 현실화되어 있지만, 열차 규모에서 수십 년간 인구 전체의 칼로리·단백질·미량영양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고효율 수경재배, 곤충 농장, 바이오리액터, 미세조류 배양 등 고도화된 복합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질병·해충·유전적 다양성·미세오염 누적 같은 변수도 관리해야 합니다. 선로 유지 역시 혹한·빙설·풍하중·열하중을 이겨낼 재료·토목 기술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일부 요소는 과학적 상상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곤충 단백질은 이미 식품 공학에서 현실적인 대안이고, 수경/에어로포닉스는 도시 농업의 핵심 기술로 확산 중입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도시’로 설계해 기능을 칸별 모듈로 분할하는 개념도 시스템 공학적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요컨대 <설국열차>는 ‘물리적 영구운동’이라는 불가능 위에, ‘가능한 지속가능성 기술’들을 혼합해 사회·정치적 우화를 만든 작품입니다. 과학의 엄밀함이 아니라, 과학이 던지는 윤리와 시스템의 질문—기후위기, 에너지 불평등, 배분 정의—를 드라마틱하게 가시화한 것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
<설국열차>는 불가능한 엔진을 전제로 하지만, 그 위에 가능한 생존 기술과 냉혹한 배분 정치학을 쌓아 올려 오늘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을 만듭니다. 그래서 다시 볼수록 질문이 늘어납니다. 무엇이 시스템을 달리게 하는가, 누가 비용을 지불하는가, 기술은 윤리를 대체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각자의 답을 찾아보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을 ‘영화와 과학’의 관점으로 감상하는 가장 흥미로운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