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The Reader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글을 모르는 여자의 비밀과 사랑 이야기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책으로 먼저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죠.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책으로 읽으면 더 몰입이 돼 내용에 쏙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를 봤을 때 내가 상상했던 여주인공이 다른 모습이어서 좀 이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책을 읽으면서는 뚱뚱하고 키 작은 여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했었거든요. 하지만 영화의 여주인공은 너무 아름다운 케이트 윈슬렛이었잖아요.
영화 <The Reader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는 독일의 역사와 인간의 죄, 그리고 사랑과 이해를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풀어낸 작품입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하고, 케이트 윈슬렛과 랄프 파인즈, 데이비드 크로스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도덕적 혼란. 이 부분은 우리나라 해방 이후의 이야기와 어쩌면 비슷할 지도 모르겠어요. ‘책 읽기’를 통해 감정을 나누는 과정, 그리고 서로를 신뢰하는 과정은 나이 차이가 큰 이 커플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작품은 역사와 사랑,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름답고 섬세하게 담아내며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책으로 이어진 첫사랑, 그리고 기억의 시작
영화는 195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은 길을 가다 몸이 아파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이런 미하엘을 우연히 한나가 도와줍니다. 그녀는 전차 검표원으로 일하는데 나이는 미하엘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죠. 이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한나는 매번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미하엘은 『오디세이아』, 『안나 카레니나』, 『호두까기 인형』 같은 고전들을 그녀에게 읽어주며 문학을 통해 감정을 나눕니다.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 한나. 이 모습은 연인들이 하는 연애려니 했습니다. 왜, 남자가 여자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거나.. 하는 그런 연애 말이죠. 미하엘이 읽어주는 소설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걸 보면서 '듣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고요.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를 넘어, 글과 소리로 이어지는 ‘감정의 언어’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열다섯 살 소년과 나누는 사랑은 사실 '금기'의 영역이죠. 성숙한 여인에게 푹 빠져버린 사춘기 남자아이의 사랑은 어느 날 훌쩍 사라지고 맙니다. 왜, 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걸까?
죄와 용서, 그리고 읽지 못한 인생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미하엘은 법학 강의 시간에 전범 재판을 참관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충격적인 얼굴을 발견합니다. 바로 사라졌던 한나였습니다. 그녀는 나치 시절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던 혐의로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와 동료들은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사건의 책임을 묻고 있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동료들은 한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만, 그녀는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장면에서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녀는 감시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법정에 선 동료들은 한나가 서류를 쓰고 서명도 했다며 증거로 들이밉니다. 재판장은 필체 감정을 위해 한나에게 종이와 연필을 줍니다. 서명을 해 보라고 말이죠. 이때 서류를 쓰지 않았지만 한나는 자신이 했다며 모든 혐의를 인정해 버립니다. 이 때 미하엘은 눈치를 챕니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녀의 ‘문맹’이 저지르지도 않은 전범의 모든 혐의까지 인정하게 만들어 '종신형'을 받게 했다는 사실까지. 그리고 미하엘은 깨닫습니다. 그녀가 늘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 했던 이유,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던 이유를. 그는 법정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단서를 알고 있었지만 죄와 정의 사이에서 그는 침묵합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한나의 죄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침묵’을 마주하게 됩니다.
책이 다시 이어준 관계
몇 년 후, 한나는 감옥에 복역 중이고, 미하엘은 변호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합니다. 어느 날 그는 옛 카세트 녹음기를 꺼내어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가 한나에게 읽어주던 그 목소리로 『제인 에어』, 『체호프의 단편들』, 『마르케스의 소설』을 녹음해 감옥으로 보냅니다. 이걸 받아 든 한나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토록 간절히 읽고 싶었던 책들을 다시 펼치는 행복한 감정과 미하엘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됐을 때 정말 감동하고 맙니다. 한나는 녹음을 들으며 스스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늦깎이 배움의 인생으로 들어선 한나는 감옥에서 마침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그녀에게 ‘늦은 구원’이 됩니다. 영화의 또 하나의 명대사가 이 시점에 나옵니다. “The only thing that can heal the wound is understanding.”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해입니다.) 그녀는 미하엘의 용서 대신 스스로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문학은 그녀의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진실, 기억, 그리고 인간의 복잡함
감옥에서의 긴 세월이 지나고, 한나는 출소를 앞둡니다. 미하엘은 그녀를 위해 집을 구하고 준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아, 왜 그랬을까요. 그녀의 남긴 편지와 함께 읽은 책 한 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The Lady with the Little Dog(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었습니다. 이제 ‘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이해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죄책감의 끝이자, 스스로의 용서를 향한 마지막 행위였습니다. 미하엘은 그녀의 묘에 꽃 한 송이를 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I don’t think I understand it all.” (나는 아직 모든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 대사는 영화의 중심 주제를 대변합니다. 인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간답다는 메시지 아닐까요.
문학이 남긴 인간의 흔적
<더 리더>는 책을 읽어주고 들어주는 과정이 생긴 이유를 그 사람들의 과거에서 찾습니다. 한나는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글자를 배워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미하엘은 과거를 잊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 역시 성장합니다. 글자를 몰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던 한나와 그런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미하엘. 세상에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한나를 단독범으로 몰아간 그들은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작당하고 한나에게 죄를 뒤집어 씌으고요. 글을 아는 사람들의 뻔뻔함과 부도덕함 앞에 오히려 글을 모르는 한나의 '부끄러운' 거짓말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